디자이너 눈에 비친 조금 다른 세상 20가지


저도 원래 그렇진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눈에 색다른 콩깍지가 씌더라고요. 아마 직업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필터가 존재하기 마련인가 봐요. 종일 컴퓨터만 바라보는 디자이너에겐 가끔 세상이 1920×1080픽셀의 세상으로 보이기도 해요.

친구들과 길을 걷다가도 왠지 혼자만 불편해지는 지점이 생겨요. 때론 아무도 모르지만 혼자 발견하고 키득키득하기도 해요. 용기 내서 “저건 HG꼬딕씨 폰트야!”라고 말해도 친구들의 반응은 “어쩌라고.”예요. 그럴 때면 종종 시무룩해지긴 하죠…

하지만 디자이너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꽤 흥미진진한 일이에요. 제목만 보면 디자이너의 인사이트와 철학에 대한 이야기 같을 거예요. 하지만 제 글은 그런 걸 다루지 않아요. 인사이트 얘기는 브런치에 검색해보면 오조오억 개가 나와요. 우린 길거리와 책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룰 거예요. 자, 시작!

 

1. 간판 자간 틀린 거 보기

지나가다가 간판 자간이 엉망이면 불편해져요. 너무 좁으면 가독성을 걱정해줘요. 아이고 세상에 사장님… 저에게 맡기시지… 저래서야 손님들이 읽을 수나 있겠어요… 또는 메뉴판을 볼 때도 행간이 보여요. 손글씨 메뉴판은 왠지 오른쪽으로 점점 올라가는 글씨가 거슬려요.

 

2. 폰트 알아맞히기

CGV 가서 광고 보다 보면 광고 중 80%에 모두 HG꼬딕씨 폰트가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런 걸 보면서 혼자 괜히 뿌듯해져요. 헤헤 알아냈다…하면서. 저건 노토산스! 저건 나눔! 저건 헬베티카! 저건 가라몬드다! 이런 거 알아내면서 으쓱해져요. 괜히 옆자리 애인에게 자랑해요. 저건 헬베티카 쓴 거다?…

 

3. 광고 사진 픽셀 깨진 거 찾아내기

전단지나 지하철 스크린도어 광고 보면서 뭔가 픽셀 깨진 거 보면 불편해져요. 여백 잘못 줘서 살짝 흰색 나온 것도 발견해요. 디자이너는 세상을 픽셀 단위로 봐요. 옆 친구가 말해요. ‘그런 것 좀 찾지 마.’

 

4. 괜히 광고 보면서 어떻게 만들었을까 궁리하기

음… 저건 일단 레이어 마스크 씌우고 배경 지운 다음, 오브젝트에 블러 주고 레이어 하나 더 만들어서 블렌딩해서 만든 거겠지… 저건… 저건 뭐지? 저건… 음… 일단 일러로 선 따서 오브젝트 만들고, 3D로 눕혀서 돌출 효과 준 다음, 포토샵으로 넘겨서 왼손으로 이렇게, 오른손으로 이렇게 한 거겠다!

라고 생각하고 뭔가 내가 다 아는 스킬이면 뿌듯해져요. 저건 어떻게 만들었지? 하고 궁금해지면 그때부터 뭔가 불편해… 찾아보고 싶어.

 

5.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

가끔 텀블벅에 펀딩 중인 디자인 제작물이나, 핀터레스트와 비핸스에 올라온 거 보다 보면 양가감정이 들어요. 하아… 얘네들은 왜 이렇게 잘하는 거지? 내 손은 왜 너구리 손이지? 찰흙으로 만들었나? 거의 태양의 기사 피코 손이야…

참고: 〈태양의 기사 피코〉의 피코는 봉제 인형입니다…

하면서도 한편으론 ‘저 정도는 나도 맘만 먹으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도 들어요. 만드는 방법이 대략 머릿속에 그려지면 자신감이 갑자기 솟음. 하지만 일단 맘을 먹질 않는다는 게 문제고, 방법을 아는 건 사실 중요치 않아요. 저 발상을 했다는 게 중요하니까…

 

6. 정렬 틀린 거 불편해하기

윈도 계산기의 1픽셀….

뭔가 책 높이가 안 맞으면 불편해요. 다 빨간색인데 노란색이 하나 있으면 이상해요. 뭔가 혼자 정렬 안 맞고 한 칸 정도 들여쓰기 되어있으면 아… 저걸 어떻게 하고 싶은데… 하앍… 저… 저걸… 제발… 옮겨줘!……

 

7. 격자무늬 투명으로 보기

디자이너에겐 투명으로 보여요. 이젠 하도 익숙해져서, 저 어지러운 투명레이어 위에서도 뭐가 뭔지 대략 알 수 있어.

 

8. 새끼손가락 항상 컨트롤에 두기

뭔가 편함

네, 새끼손가락이 항상 뭔가 긴장해있어. 지금 타자 치는 데도 새끼손가락이 당장이라도 컨트롤을 누를 것 같아. 그리고 검지는 항상 S를 누르기 위해 노력하죠. 보통 타자 칠 때 오른손의 중지는 ‘ㅏ’를 누르게 되어있어요. 하지만 왠지 모르게 나는 자꾸 O를 누르려고 한다고. 뭘 자꾸 열려고 하는 거야…

 

9. 모니터는 최대한 가까이 보기

바른 디자이너의 자세

모니터가 얼마나 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32인치가 아니라 32인치 할아버지가 와도 난 모니터를 5cm 앞에서 바라볼 거야. 아이맥이면 다를 것 같지? 아니에요. 아이맥은 좀 더 선명하게 5cm 앞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어쨌든 바라보는 거리는 변하지 않아요.

 

10. 책 표지 보면서 레퍼런스 찾기

괜히 이쁜 책 보면 사진 찍어버림. ‘레퍼런스 해야지이~’ 하면서 어딘가 저장해요. 그리곤 기억에서 사라져요(…) 어디 갔는지 몰라…

 

11. 매거진의 가독성 비판하기

이건 좋은 매거진!

안 읽히면 대차게 비판해버려요. ‘아 이거… 뭔가 한눈에 딱 안 들어와!’ 하면서 갑자기 안물안궁 크리틱을 시작해요. ‘폰트만 크게 해놓고 여백이 너무 좁네… 행간도 되게 애매하고.’ 하며 구시렁구시렁 하다가 매거진을 내려놔요. 안 읽히면 안 보면 되지만, 디자이너는 굳이 안 읽히는 이유를 찾아요.

 

12. 모든 곳에서 콘센트 발견하기

찾았다!

디자이너에게 카페는 단순히 티라미수와 커피를 섭취하는 곳이 아니에요. 메뉴와 분위기를 봄과 동시에 와이파이와 의자, 책상의 편의성, 그리고 콘센트의 위치를 함께 봐요. 제아무리 이쁘고 힙해도 콘센트가 없다면 그곳은 미미의 집 같은 곳일 뿐이에요.

 

13. 이쁜 소품 보면 찍어놓기

커… 커여워!

인스타에 올리려고 찍는 게 아니에요. 물론 종종 올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언젠가 굳즈 만들 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찍어놓는 거예요. 도대체 그놈의 굳즈는 언제 만들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나도 이런 거 만들어봐야지!’ 하는 마음은 모두가 매한가지예요.

 

14. 아티클 있으면 저장해놓기(안 봄)

…… 저장해놓고 안 봤어요…

페북과 구글 등등 인터넷의 바다엔 온갖 종류의 디자인 관련 아티클과 정보가 넘쳐나요. 와씨 이건 진짜 개꿀팁이다! 레알 이거 나중에 꼭 봐야지! 해놓고 즐겨찾기에 넣고 게시물을 저장해요. 그리곤 내면 깊숙한 어딘가에서 이슬로 사라졌다고 한다…

 

15. 카페 옆자리 디자이너 시안 보면서 부러워하기

강남 빈브라더스 가면 주변에 디자이너가 3명 이상은 반드시 있어요. 스벅에도 마찬가지예요. 할리스는 공부방 모드로 좌석이 바뀐 이후론 거의 성지가 되었어요. 상수역 골목에 이리카페도 디자이너 천지에요. 제비다방도 디자이너가 우글거려요. 화장실 가다가 담배 피우러 나가다가 옆 사람 시안 슬쩍 봐요. 잘해요(못해도 잘해 보여요). 괜히 부러워요. 흥, 잘하네.

 

16. 새 메일 무서워하기

안심.

아침에 일어나서 새 메일 +2가 떠 있으면 무서워요.

 

17. 후드티 사랑하기

후드티는 여러 가지 모드로 전환할 수 있는 최고의 유니폼이에요. 머리를 안 감았을 땐 모자를 쓰면 되고, 엎드려 잘 때도 모자가 크면 훌륭한 암막 커튼이 돼요. 후드티엔 기모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부들부들하니 좋아요.

후드는 한 사이즈 크게 입어야 또 제맛이에요. 그리고 주머니에 뭔가 그득그득 들어있고. 오래 입어서 뭔가 소매가 헤져 있으면 더욱 빈티지스러워요. 후드티에 회색 츄리닝 입고 노트북 들면 다 이길 수 있어요.

 

18. 오르막길 힘들어하기

오래 앉아 있다 보면 합정역 계단도 트래킹 코스가 돼요.

 

19. 협업 제품 보고 감탄하기

괜히 컬래버레이션 제품 보면 우왕우왕거림… 괜히 1300K랑 박카스랑 협업한 제품 보러 가고, 나이키랑 누구랑 컬래버했다고 하면 보러 가고, 마리몬드랑 3M이랑 뭐 했다 하면 보러 가고… 팝업스토어도 짱 좋아해요. 브랜드 팝업스토어 뜨면 왠지 한번 가보고 싶어요. 그리고 구리다와 예쁘다를 판가름해요. 거의 매사에 크리틱이 생활화된 것 같아요.

 

20. 살 건 없지만 괜히 프리스비 매장 구경하기

괜히.

자꾸 보다 보면 내 것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자꾸 장비 구경해요. 프리스비는 그래도 양반이지. 용산 가면 와콤 팝업스토어가 있어요. 거긴 신세계에요. 디자인 문구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요. 핫트랙스 꼭 가야 해요. 무인양품도 괜스레 들어가 봐요. 이걸 사면 왠지 디자인이 더 잘 될 것 같아요. 말도 안 돼요. 하지만 기분적인 느낌이 그래요.

원문: 애프터모멘트 크리에이티브 랩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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